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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17 호
성 김대건 안드래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 2003년 09월 21일 (나해)
 
 
이 주일의 말씀 : 순교자 시복시성 운동으로 새로운 복음화의 물결이 일어나기를!     조환길(타대오) 신부 / 교구 순교자 시복시성 추진위원장
교황메시지 : 태풍 매미로 피해를 입은 한국민에게 보내는 교황 성하의 위로 메시지     국무원장 안젤로 소다노 추기경
교구 가정대회 준비를 위한 묵상(7) : 가정기도     김용민(안드레아) 신부/가정사목담당
묵상해봅시다 :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9, 35)     편집부
알아봅시다 : 우리 나라에서 천주교 박해가 왜 일어났나요?(1)     '함께 하는 여정' 중에서
 
 
이 주일의 말씀
순교자 시복시성 운동으로 새로운 복음화의 물결이 일어나기를!

오늘은 이 땅에서 목숨을 바쳐 하느님을 증거한 103위 한국 순교 성인들을 기리는 날입니다. 20여년 전 군종신부 시절에 강원도의 군인신자들을 데리고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있었던 우리 순교자들의 시성식(1984년 5월 6일)에 참석했을 때의 그 감동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얼마나 흐트러져 있습니까! 영세자와 주일미사 참례자는 자꾸만 줄어드는 반면 냉담자는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어떤 위기감마저 듭니다. 성당에 잘 나온다는 신자들도 자신의 신앙에 대한 확신이 적고, 따라서 믿음 따로, 생활 따로인, 그야말로 따로국밥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지요! 20년 전 그날의 감동과 감격을 오늘에 되살릴 수는 없을까요?
103위 시성식이 있은지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다시 우리 신앙 선조들의 시복시성을 위한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나라에 성인의 수가 적어서 하는 것도 아니요, 순교자들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즉 그분들에게 영광 돌리기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시성’이란 말의 라틴말인 ‘Canonizatio’란 말이 뜻하듯이 순교 성인들은 우리 신앙생활의 모범이 되기 때문에 우리도 그분들을 본받아 그분들처럼 믿음과 삶으로 하느님을 증거하는,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함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복시성운동은 천상의 성인들보다는 지금 지상에 살아있는 우리들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정해박해(1827년) 때 경상감영 옥에서 옥사하신 순교자 안군심(리카르도)는 경상감사가 “백성이 국법을 어기는 것은 상감께 대한 불충이 아니냐?”하고 심문하자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천주는 우주만물의 주인이시요 모든 이의 아버지시니 그분을 만물 위에 공경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주를 공경함은 국법보다 우선하는 것입니다.”
“하나이신 천주를 만유 위에 공경하라(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라).” 이는 십계명 중 제1계명입니다. 순교자들은 무엇보다 이 제1계명을 철저하게 지키다가 돌아가신 분들로서 우리들에게 참으로 큰 믿음의 ‘본(Canon)’이 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천주를 만유 위에 공경합니까? 하느님보다 돈이나 자기 자신을 더 섬기는 것이 아닙니까? 성당에서는 ‘주님, 주님!’하고 불러놓고서 밖에 나가서는 전혀 신자 아닌 듯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이닌지요? ‘주님’을 가운데 모신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저 구석방에 모셔놓고는 “거기 가만히 계십시요. 나오지 마시고.”하고는 주님 뜻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만 살아가고 있지나 않은가요? 그래도 천주교 신자라고, 순교자들의 후손이라고 해도 될까요? 그분들은 목숨을 바쳤는데 우리는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요? 옛날 팔공산 한티재를 관통하는 도로가 생기기 전 9월 복자성월이 되면 동명 송림사 앞 버스 종점에서부터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한티성지까지 도보로 순례하였던 그 때가 문득 그리워집니다.
오늘 한국 순교자 대축일을 지내면서 왜 우리가 지금 순교자 시복시성 운동을 펼쳐야 하는지 그 의미를 우리 모두가 알았으면 싶습니다. 그리고 이 운동으로 말미아마 20년 전에 있었던 시성식이 다시 이 한반도 위에서 거행됨으로써 ‘새로운 복음화’의 물결이 다시 한번 일어났으면 싶습니다.
“저희도 죽기까지 복음을 따라 살게 하소서.”(오늘 본기도 중에서)


조환길(타대오) 신부 / 교구 순교자 시복시성 추진위원장

교황메시지
태풍 매미로 피해를 입은 한국민에게 보내는 교황 성하의 위로 메시지


교황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는 한국을 휩쓴 태풍으로 엄청난 인명 피해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깊이 슬퍼하시며, 희생자들과 그 유가족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구호와 복구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정부 당국에 연대 의식을 표명하시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고통받는 모든 사람에게 힘과 위로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청하고 계십니다.

국무원장 안젤로 소다노 추기경

교구 가정대회 준비를 위한 묵상(7)
가정기도

대화를 나누지 않는 것이 오늘날 가장 큰 문제입니다. 우리는 어느새 가족끼리 대화하기 위해 모이고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것보다 TV나 컴퓨터 앞에 앉거나, 애완동물을 만나기를 즐겨하게 되었습니다. 가정은 공동체이고 공동체는 인격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합니다. 이 인격적인 관계는 함께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며 대화로써 성장해갑니다. 대화를 위한 모임과 서로를 지지해주는 대화가 없다면 가정은 더 이상 공동체가 아닐 것입니다. 공동체가 아니라면 거기에서 어떠한 삶의 힘도 얻을 수 없는 사막이 됩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은 사회 기초 공동체이고 동시에 가장 작은 하느님 자녀들의 공동체, 곧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주님이신 그리스도님과 우리 가족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인격적인 관계로 이루어집니다. 이 인격적인 관계 역시 온 가족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으로 시작하며 그분과 함께 나누는 대화인 기도로써 성장하게 됩니다. “단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함께 있겠다(마태 18,20).” 가족이 함께 모여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 안에서 서로에게 귀 기울이며 서로를 위한 축복을 기도하는 자리는 가정이 교회, 곧 생명을 주는 공동체임을 결정적으로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가정기도의 자리는 우리 삶을 위한 온갖 위로와 젖과 꿀이 흐르는 복된 땅입니다. 대화가 없는 사막과 같은 오늘날의 삶에 한줄기 오아시스가 되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한주에 한번이라도 우리가 주일에 성전에 모여 기도하듯 가족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 가정은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는 가정입니다.

김용민(안드레아) 신부/가정사목담당

묵상해봅시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9, 35)
요즘 TV에 ‘사랑과 전쟁’이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한 평생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서로 사랑하겠다고 주례자 앞에서 맹세한 부부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이혼을 제기하는데, 시청자들이 배심원이 되어 이혼여부를 선택하게 합니다. 오늘날 이혼율 집계를 보면 결혼한 3쌍 중 1쌍이 이혼을 한다고는 하지만, 주례자 앞에서 검은 머리 파뿌리될 때까지 서로 사랑하겠다고 다짐했던 두 사람이 신의를 저버린 채 이러저러한 이유로 헤어지는 것이 비일비재하다니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루가 9,24)라고 말씀하십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인 오늘, 자기 목숨까지 버리면서 하느님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던 선조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세례를 받으며 하느님을 믿겠노라는 맹세를 한 순교 성인들은, 배교를 하면 살려주겠다는 칼날 앞에서도 절개를 지켰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순교의 삶을 살아가야 할 우리들은 순교한 선조들을 본받아 예수님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고 실천하며, 물질적 풍요, 자기기만, 자만심, 이기심, 개인주의, 쾌락, 끊임없는 자기주장에서 탈피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편집부

알아봅시다
우리 나라에서 천주교 박해가 왜 일어났나요?(1)



  서구사상인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전례되는 과정에서 약 100년 동안 다섯 차례에 걸친 박해가 있었습니다. 당시 교황청에서는 조상의 제사를 우상숭배로 보아 금지하였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충효사상을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조상제사 또한 매우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조상제사를 거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인간 존엄성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대군대부(大君大父)라고 불렀으며, 믿음을 버리기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였습니다.

'함께 하는 여정' 중에서